본문 바로가기

봉천동나눔의집 소식

[가정결연이야기]할아버지의 기억을 잡고 싶어요


나눔의집 사무실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커다란 은행나무와 대추나무가 심겨 있는 빌라가 있습니다. 빌라 지하 단칸방엔 아흔의 할아버지와 여든의 할머니가 살고 계시지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는 종일 집에 계셔서 방에 찾아가지 않으면 얼굴 뵙기 힘들지만, 할아버지는 주변을 자주 산책하십니다. 


갑갑한 지하 방을 벗어나 주변을 산책하시는 것이 할아버지의 낙이지요. 특히 나눔의집에 오실 때면 언제나 구두부터 모자까지 갖춰 입고 오십니다. 할아버지는 백발이 멋진 신사지요. 하지만 요즘 할아버지의 외출이 많이 줄었습니다. 아흔 연세에 기력도 떨어지셨고 할머니 걱정에 잘 다니시질 못합니다. 


걱정스러운건 요즘 할아버지의 치매가 많이 심해지신 것 같아요. 잠깐 산책 나오실 때도 잘 차려입으셨던 분인데 요즘 더운 날에도 내복이나 방한복을 입고 나올 때도 있으시고. 속옷 차림으로 나오시는 등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이셔서 걱정입니다.


얼마 전, 할아버지는 목이 쉴 때까지 목청을 돋우며 옆집을 향해 고함을 치셨습니다. 그간 옆집 어르신에게 서운하셨던 것을 이번에 다 표출하시는 듯했습니다. 문제는 욕을 들으시는 옆집 분들도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무슨 이유일까?' 화내는 이유를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주민센터 복지담당 선생님이 오셔서 소리치는 것은 그만두셨지만 할아버지의 억울함은 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할아버지와의 소통은 점점 힘들어지고, 찾아오는 이들의 얼굴도 할아버지의 기억에서 점점 흐려지는 듯합니다.


당뇨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대신한 가사 노동은 아흔의 할아버지에게 버거운 일입니다. 특히 할머니의 인슐린 주사는 가장 큰 어려움이지요. 누군가 대신 처리해주면 좋을 듯한데. 할머니는 할아버지 외엔 누구의 도움도 거절하십니다. 오른다리, 왼다리, 오른팔, 왼팔 순으로 혹 같은 부위에 계속 주사를 놓을까 달력에 날짜 별로 표시하지만 이젠 이 달력 표시마저도 기억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였습니다. 날짜, 요일, 볼일 보러 가야 할 일들을 할머니가 기억해 주지 않으면 많은 것을 잊고, 놓치게 됩니다. 


저희가 조금 더 자주 찾아뵙는 수 밖에 없네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서로 의지하며 건강히 지내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